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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까지 한옥마을은 슬로우시티라는 이름을 유지할 만한 정도의 사람수만 있는 곳이었다.

원래 한옥마을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관광객으로 북적북적하는 동네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개발과 관광화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관광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상점도 앞다투어 들어오기 시작해 결국 현재의 이 모양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갔던 때는, 막 관광화가 시작되어 초반을 살짝 지나 중간쯤으로 넘어가는 길목정도의 시기였다.

한옥마을에 내가 공연 연습을 하던 연습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연습실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한옥마을  밤 산책을 하고 있었다.

오목대를 올라 전주 전경을 보고 내려오는데, 모 전시관 쪽 근처에서 소규모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요 근래엔 더 많이 보이지만, 국악기들과 서양악기들 혹은 밴드를 접목시켜 , 조금은 편하게 대중들에게 접근을 하고자 한 그런 악단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맨 앞에서 살짝 뒤쪽, 정가운데 부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아리 때문인지 국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공연은 더욱 흥미로웠고, 내가 아는 한 그녀에게 친절히(? 귀찮았으려나, 아니 그녀도 싫어하지 않았던걸로 기억한다) 설명을 해주며 공연을 감상하였다.

아무래도 타악기가 들어간 공연은 보통은 빠른 템포,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기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어느덧 공연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곡, 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쑥대머리’

옥중의 춘향이가 임을 그리워 하며 부른 ‘옥중가’ 중의 하나. 판소리에 나오는 한이서린 약간은 딱딱한 음악이, 한 여인의 애절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악단들의 보컬은 일반 보컬과 다르게, 판소리를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약간은 허스키한 보이스를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그 소리에서 터프함, 강인함, 그리고 恨.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공연을 제외하곤 상당히 조용했던 그 날 한옥마을에, 잔잔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노랫소리는 사람을 음악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마지막(기억하기로는) 공연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대단한 감동을 선사했다. 

약간은 서늘했던 봄밤. 

관람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절묘하게 ‘쑥대머리’를 현대화 시켜 해석도 잘하였고, 가수는 그 노래를 기가막히게 뽑아내었다.

전주를 벗어나 돌아오는 택시에서 조차, 우리에게 그 여운은 진하게 남았고,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에 검색을 하였다(이 땐 아직 스마트폰 보급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 즈음). 

알고보니 박애리씨가 부른 쑥대머리를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원곡보다 우리는 오늘 부른 가수의 악단과 그 가수가 부른 버전의 mp3를 찾고 싶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아쉬운데로 박애리씨의 쑥대머리를 구매하였다. 

한동안 우린 그 쑥대머리를 함께 흥얼거리며 다녔다. 가사에 나오는 망부석을 어루만지는, 아니 망부석이 취할 것 같은 그 모습을 흉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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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과 축제가 W 대학교에서열렸던날,

매년마다 열리는 축제여야 했지만, 근 4년간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던 그 날의 축제,

그 당시 난 후배들 공연 전체 구성 및 연출?을 짜주느라 바빳다.

축제 며칠 전부터 가까운 학교 였기에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하며, 그들을 봐주고,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시 잔소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땐 나름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므로, 공연을 꾸미는데 참 열심히 도와주었다.

축제 전 날까지 모든 공연관련 얘기는 해당 판을 이끄는 이에게 전달을 하였고, 축제날이 돌아왔다.

그녀가 도착하였고, 우린 같은 과티로 갈아입은 후, 함께 돌아다녔다.

학생회는 부스를 여느라 분주했다. 미꾸라지 레이스 , 같은 학번 형들이 열었던 빵집, 다른 대학교 부스, 진행요원.

마침 학생회가 우리 동기들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어색하지 않게 부스들을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운이 좋았는데, 미꾸라지 레이스에서 도박으로 무려 3만원이라는 거금(무려 1등을 연속 2번 맞추고 뒤로 빠졌다지)을 거머쥐었고, 우린 그 돈으로 맛있는걸 먹으러 다녔다.

느즈막한 저녁즈음. 내가 기획을 해주었던?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연에 무언가 참여를 했던 사람이라면, 그 공연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무척 궁금하다. 특히나, 후배들, 그리고 몇날몇일을 함께 고생했던 이들의 공연이기에,,,

공연이 끝났다.

사실 그 날 공연이 잘 되었는지, 어땟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풍물패의 공연은 끝이나서 퇴장을 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풍물패들 끼리의 뒷풀이가 이어진다.

뒷굿이라고도 하는 난장이 벌어지는데, 이 부분이 우리 모두에겐 제일 즐거운 부분이다.

나도 그 무리에 들어가 민폐가 되라고 악기를 쳤을거다, 아마도...

우린 술을 마셨다. 함께, 즐거운 기분으로, 

술이 취할 즈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택시에서 뻗듯이 누워버린 그녀를 집까지 업고 들어와야했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업힌게 분명했지만,

우린 얼마 전의 감흥에 겨운, 쑥대머리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이 노래엔 약간의 개그코드도 들어가 있었다. 그 애절한 표정을 코믹하게 흉내내며 부르는게 너무나도 재밌었기 때문에,

우린 그렇게 술에 취한 채로 손짓, 발짓하며 노래를 불렀다.


난 아직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

다만, 이 노래에 대해 말해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를 표현하진 않지만,

그 때 그 사람도 아직 이 노래를 좋아할까. 조금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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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보다 6살 연상인 후배였다. 

우리는 그 어느 커플만큼 자주 다퉜다. 

23의 남자는 아직 철이 없었다. 

그리고 29의 여자는 늘 불안해했다.

여자는 결혼을 바라볼 나이었으나,

남자는 아직 커야할 날이 몇 년은 남은 나이었다.

 하지만, 남녀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이들은 주변을 바라본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건, 생각보다 잔인하니까.

주변의 다른 문제점들로 다투기 시작한다.

다툼의 의미는 여러가지 일 수 있지만, 

여기에서의 다툼은, 상대를 보내주기 위한 약간의 발악같은 느낌이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어쩌고 저쩌고라는 소리로 우리의 연애가 폄하되는 걸 원하진 않는다.

우린 둘 다 진심이었으니까, 

어쩌면 마지막에 끈을 놓아버린 내가 결국은 나쁜놈이었겠지만,

어쨋든.

자잘한걸로 다투던 어느날, 

쌓일데로 쌓인 스트레스,

오랜만에 너를 만나야할 그 시간에 난 동아리 MT에 따라갔다.

난 이해를 바랬을 수도, 혹은, 이미 너의 반응을 예상하고서 그랬을 수도 있다.

다음날, 난 너를 찾아갔고, 헤어지자는 너의 말을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알았다며 나왔다.

눈을 감지 않고도 눈물이 나오는 빨간 눈망울이 보였다.

하지만, 그 날의 넌 매정했다. 아니 굳건했다. 

그리고 나 또한, 매정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매정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나와서 조금 지났을 쯤, 난 뛰었다.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걸었다.

담배를 물었다. 

생각보다 담배가 맛있었다.

울음이 나오진 않았다.

신기하게도 기뻣다. 

왜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담배를 한 대 더폈다.

뭔가 큰 일을 끝마친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린 우리의 쑥대머리를 완성한 줄 알았다.



박애리 - 쑥대머리


https://youtu.be/isZlmHNyMlM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 숲을.

그리곤 다른 일이 겹쳤고,

난 외국으로 도피를 했다.

심란했던 마음의 도피처,

그렇게 7일만에 난 인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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